||0||0"기도"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이사 63,16).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11,2-4)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방식이 매료 되었다.
특히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위대한 기도자로 서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마태오 복음에서 주님의 기도는
산상 설교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여러 가르침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드러나지 않게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 마음의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숨겨진 골방에도 거처하신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이자
우리 안에 계신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이기도 한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동시에 어머니시다.
하느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자 어머니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시며,
우리가 당신을 체험하여 새로운 행동 방식을 익히기 바라신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에서 산상 설교의 중심에 놓여 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체험하는 이는
새로운 행동방식을 익혀 화해할 수 있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기도는 행동을 요구한다.
베네딕토는 외친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일"
일은 실존의 정점도 아니고
진통제도 아니다.
단순히 일일 따름이다.
고되면서도 견딜만하고
평범하고 길들어
단조롭고 되풀이 되는 것이 일이다.
삶을 유지시키면서도
동시에 차츰 소모시키며,
불가피하면서도
- 지나친 고역이 되지만 않는다면 -
그런대로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일이 우리에게 아주 <맞을> 수는 없다.
제아무리 고상한
창조적 충동의 실행으로서 시작된 경우라도
영락없이 지루하게 단조로와지고,
같은 것을 지겹게 되풀이하는
회색 노고가 되며,
예측 못한 것 내지
인간이 안으로부터 행하는 것이 아닌
밖으로부터 낮설게 들이닥치는 것의 무게를
받아내야 한다.
나아가 일이란
언제나 남들의 처분에,
주어진 보조에 자기를 맞추어야 함을,
우리들 중 아무도 혼자 택하지 않은
공동목표에 이바지함을,
즉 공동선을 향한
순종과 극기를 뜻한다.
따라서 일의 신학이 해야 할 첫마디는,
바로 일은
그대로 일이라는,
또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말이다.
즉, 고달프고 단조로운 것,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것,
일상적인 것이다.
<日常>(Allttaegliche Dinge)
(Karl Rahner 저, 장익 번역, 1980, 분도출판사) 중에서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이사 63,16).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11,2-4)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방식이 매료 되었다.
특히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위대한 기도자로 서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마태오 복음에서 주님의 기도는
산상 설교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여러 가르침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드러나지 않게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 마음의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숨겨진 골방에도 거처하신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이자
우리 안에 계신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이기도 한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동시에 어머니시다.
하느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자 어머니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시며,
우리가 당신을 체험하여 새로운 행동 방식을 익히기 바라신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에서 산상 설교의 중심에 놓여 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체험하는 이는
새로운 행동방식을 익혀 화해할 수 있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기도는 행동을 요구한다.
베네딕토는 외친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일"
일은 실존의 정점도 아니고
진통제도 아니다.
단순히 일일 따름이다.
고되면서도 견딜만하고
평범하고 길들어
단조롭고 되풀이 되는 것이 일이다.
삶을 유지시키면서도
동시에 차츰 소모시키며,
불가피하면서도
- 지나친 고역이 되지만 않는다면 -
그런대로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일이 우리에게 아주 <맞을> 수는 없다.
제아무리 고상한
창조적 충동의 실행으로서 시작된 경우라도
영락없이 지루하게 단조로와지고,
같은 것을 지겹게 되풀이하는
회색 노고가 되며,
예측 못한 것 내지
인간이 안으로부터 행하는 것이 아닌
밖으로부터 낮설게 들이닥치는 것의 무게를
받아내야 한다.
나아가 일이란
언제나 남들의 처분에,
주어진 보조에 자기를 맞추어야 함을,
우리들 중 아무도 혼자 택하지 않은
공동목표에 이바지함을,
즉 공동선을 향한
순종과 극기를 뜻한다.
따라서 일의 신학이 해야 할 첫마디는,
바로 일은
그대로 일이라는,
또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말이다.
즉, 고달프고 단조로운 것,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것,
일상적인 것이다.
<日常>(Allttaegliche Dinge)
(Karl Rahner 저, 장익 번역, 1980, 분도출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