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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갈라 4, 19)



   갈라디아서의 이 말씀에서 '여러분 속에'를 '내 안에'로 바꾸어 묵상해 볼 수 있겠다.  내가 바오로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나도 남을 향하여 '여러분 안에'라고 말하겠지만 아직 그 경지에 이르기는 멀었고, 그래서 바오로가 말하는 여러분 안에 '나'를 포함시켜 묵상을 해보는 것이다. 내(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해산의 고통을 겪겠다고 바오로가 말하는 것은 나(여러분)에 대한 바오로(교회)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도 내 편에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그래서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형성되어 탄생할 때까지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고통은 나를 참 인간으로 태어나게 한다. 다시 말해 참 인간은 이런 해산의 고통을 통해 태어난다.



   바오로는 또 다른 고통을 이야기한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기까지 겪는 고통을 넘어 남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내가 당하는 고통이다.  바오로는 이 고통을 해산의 고통으로 표현한다. 나는 내 안에서뿐 아니라 남 안에서도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 고통을 피하려 할 때 남(환경)은 '내게 고통을 주는 존재'로만 남으며, 그러는 사이 나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이 되고 때로는 남과 원수가 되기도 한다.



   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포함하여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겪는 해산의 고통, 그 고통은 우리가 참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겪어야 하는 것이다.  피해서는 안 되는 고통! 그래서 즐겨야 하는 고통! 우리는 그렇게 남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남이 그리스도로 세상에 탄생하도록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러기에 이 고통은 -비록 고통스럽다 해도 - 사랑이다.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무릇 귀엽고 사랑스런 자녀가 태어나는 것처럼.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라는 갈라디아서의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은 은총의 자유로 부름받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업적이 이룬 무가치한 공로를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공로는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그런 영적인 사람 안에서, 그의 신앙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 친히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신앙인을 당신의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즉 당신 자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은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 그리스도는 형성된다.  그런데 영적인 사랑으로 그리스도께 결합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의 인간상태에서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요한은 말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인가? 아우구스티노가 지적한 것 외에 가난한 삶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삶에 대한 것을 루가가 전하는 예수의 평지서교에서 들을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가 6,20-26)



   그런데 이 복음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굶주린 사람들,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은 행복하고, 그래서 그런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고, 반대로 배불리 먹고, 웃고 지내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불행하다는 이 복음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느 정도 부를 향유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기 바란다.  이 부를 포기하고 가난하게 살 수 있을까?  도대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무엇이며 부는 무엇인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껏 우리가 기준으로 여겼던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의 기준은 단순히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재산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부자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부자이다.(마태 19,16-22)



   우리는 부자이면서도 가난할 수 있고 가난하면서도 가난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소유한 것이 많아 부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 재물에 종속되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금 당장은 가진 것이 없지만 일단 재물이 주어지면 어떤 부자보다 헤프게 쓰고 남에게는 인색하게 굴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은 지금 당장은 소유한 것이 없어 가난하다 해도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의 기준이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는 것을 부를 정당화하는 말로 알아듣는다면 잘못이다.  예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더 악한 것이다.



   가난의 기준은 자신을 벗어버리는 데에 있다. 가식 없이 자신을 완전히 벗겨버릴 수 있는 자만이 진실로 가난할 수 있다. 가식 없이 자신을 벗겨버리는 것은 가진 것을 다른 사람, 특히 없는 사람과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가난한 마음 안에 형성된다.



   반대로 부자는 자기 것을 나누는 대신 남의 것을 자기 안에 모으는 사람이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가 형성될 수 없다. 삶의 가치를 소유에 두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얼마나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 주었는가? 나는 얼마나 남의 행복을 위해 굶주려 보았는가? 남을 위해 얼마나 울어보았는가? 이 굶주림과 울림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반대로 우리가 불행하다면, 우리 사회가 불행하게 보인다면 이런 굶주림이나 목마름이 없어서일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서로를 위해 울지 않고 슬퍼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굶주림과 갈증과 울음과 슬픔이 없다면, 남을 위하여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기를 두려워하고 오로지 자기 체면과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만 산다면 불행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는 희생도 사랑도 있을 수 없다.  남을 위한 해산의 고통이 없는 곳에는 불행만이 있을 뿐이다.  고통이 불행의 씨앗이 아니라 남을 위한 고통을 피해가려는 데서 불행이 싹트는 것이다.  고통을 피하고서는 정녕 가난할 수 없고, 울 수 없다. 목숨을 바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예수처럼 살 수 없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형성되는 날, 나도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어쩌면 우리도 그분처럼 "나를 보았으며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면 그때 나도 그분처럼 나의 십자가를, 해산의 고통을겪은 사랑의 십자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분을 믿는 것은 그분이 다시 태어나 당신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안에 지속시켜 주기를 바라거나 그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의 기억 속에 재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사건을 내 온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형성되는 날, 나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나를 통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형성되는 날, 나도 그분과 같이 될 것이다.  요한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그리스도가 내 안에 형성되는 날 마침내 인생은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게 어려움이 닥치거나 괴로움이 있을 때 도와 달라고 매달릴 수 있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형성시켜야 하는 존재이다.  나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형성해야 한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몸이 되어야 한다. 내가 기도를 한다면 내 몸이 그런 몸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남도 그런 몸이 되도록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우리 각자는 모두를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때 그리스도는 나의 몸에서, 내가 기도한 모든 사람의 몸에서 구세주로 탄생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겪는 해산의 고통 없이는 세상에 탄생할 수 없다.



   "인간 존재들은 형성되기 위해 어머니의 모태에서 잉태되고, 일단 형성되면 해산의 고통을 겪는 가운데 태어난다.  그래서 바오로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 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해산의 고통은 바오로가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낳기 위해 겪은 고통과 근심을 뜻한다."(토마스 머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바오로의 이 말은 다음의 말에서 더 힘을 얻는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렇게 될 때까지 우리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말인가.



   그리스도의 몸은 남을 위하여 완전히 자신을 내어놓은 몸이다. 그렇게 볼 때 바오로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는 말은 '여러분이 남을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내놓는 몸이 될 때까지 나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며 또 서로엑 해산의 고통을 청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도 내가 내 안에 그리스도를 형성하여 더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살 수 있도록 해산의 고통을 겪어주십시오."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 안에도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남을 위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그리스도의 현존이 되어주기 위해서이다.



그분께서 우리 위치에서 하셨을 일을 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의 행위를 계속하고,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내어주고 소모되고 먹히고, 다른 이들에게 자양분이 되기 위해서이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이 되기 위해서이다."(젱델, 170)



   그러기 위해서는 입으로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젱델의 다음 말은 이런 의미에서 예언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그분을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다. 또는 아니다라고 한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 다다르려면 자신에게서 떠나야 하며,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이 가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사랑의 투명함이 없이는,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참으로 자신을 바치는 순수한 삶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젱델 167)



   그리고 바오로가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바오로는 '그들 신앙의 첫걸음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성장과 성숙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오로는 고린토 후서에서 약간 다른 말로 이 해산의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매일같이 여러 고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아우구스티노)



-이제민 신부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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