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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침묵의 십자가 앞에서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조롱과 험담이 난무하는 그 사이를
말없이 걸어가십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그 길에
참담한 마음으로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조롱하는 군중들보다,
고개 숙인 예수님이
더욱 못마땅하게 여겨집니다.

왜 그렇게 순순히 걸어가십니까?
당신이 무슨 죄가 있어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생을 마치려 하십니까?
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지 않으십니까?
제발 뭐라고 말 좀 하십시오. 제발.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뿐입니다.
죽음을 향해.

답답해하는 나의 못마땅함도,
조롱하는 군중들의 시선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참을 수 없는 고통도
결코 주님의 십자가 길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생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
그것은 침묵이었습니다.
침묵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침묵 가운데 아버지를,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예수님의 침묵 가운데에서만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침묵 가운데 맞아들이신
십자가 죽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 안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욱 선명하게 우리를 파고 들어옵니다.
어떤 인간적인 말보다
더 강한 한 마디의 피맺힌 절규,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어떠한 인간적인 말로도
화려하게 치장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일 뿐입니다.
고통과 저주만이 가득한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현장.

그러나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자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 가득한 삶을 돌아봅니다.

죽을 수 없는 분의 죽음 앞에서,
죽으면 안 되는 분의 죽음 앞에서,
살 자격이 없는
그러나 버젓이 살아있는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당당하게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되새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곳곳을 헤집어
참된 삶을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런 삶,
온갖 탐욕에 물든 추악한 삶,
다른 이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길만을 찾는 이기적인 삶,
재물, 권력, 권위, 온갖 헛된 우상에
자신을 팔아버린 노예의 삶을 벗어 던지고

죽음을 넘어서는 참된 삶,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
가난한 이, 억눌린 이 없는 삶,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것을 품에 안는 삶을 살라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은
결코 강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은
분명 모든 이에게 내려진 선물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선물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선물을
기쁘게 받아 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값진 선물을
너무나도 쉽게 내팽개치는
안타까운 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로 내가
그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도 허무하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몹시 슬프고 괴롭고 참담한 날입니다.

그러나
정녕 그렇습니까?
온 몸 깊숙이 파고드는
못 박힘의 고통이
과연 나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곧 나의 삶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축 쳐진 주님의 주검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침묵을 듣습니다.
주님의 침묵 안에 담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외침을 듣습니다.

삶을 위한 죽음을 바라봅니다.
침묵 안에 당신을 묻어버리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가장 깊숙한 곳을 파고 들어오십니다.

나를 바라봅니다.
생동하는 생명을 바라봅니다.
나를 드러내려는
과장된 말과 몸짓을 바라봅니다.
떠들면 떠들수록
작아지고 공허해지는 나를 봅니다.
살고자 하면서 오히려
죽음의 길을 걷는 나를 봅니다.

나의 삶을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봅니다.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진정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죽은 듯 살고 있는 나를 일깨워
죽음을 넘어서는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 가득한 이 시간이기를 기도합니다.

- 의정부교구 송산성당 상지종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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