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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신석복(마르코)순교자 묘소에 도착하여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와 '짧은 연도', 국화꽃 헌화식을 가졌습니다.


< 신석복(마르코)순교자 묘소 설명 >

  순교자 신 마르코는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살았다. 그는 누룩과 소금 행상을 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는데 원래는 농사를 지었고 장사는 부업이었다.
  명례지방은 일찍이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마르코와 그의 가족들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그의 형제들은 마르코가 순교할 때는 신자가 아니었고 훗날 모두 입교하였다.
  순교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힌다. 창원 쪽으로 장사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함께 갔던 오 야고보도 체포된다. [병인 치명 사적]에 따르면 포졸들은 마르코가 신자인 것을 알고 동네로 잡으러 왔었다. 그러나 장사 나가고 없었기에 포졸들은 며칠을 기다린 뒤 돌아오는 마르코를 길에서 체포한 것이다. 그들은 순교자를 밀양으로 압송한 뒤 하루를 지냈다. 그동안 형제들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순교자는 완강히 거절했다.
  마르코는 대구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수차례 문초와 형벌로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다. 그렇지만 마르코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놓아주신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하고 응답하였다. 이 말에 관장은 화를 냈다. 순교자는 9일간 더 감옥에 있다가 1866년 5월 15일(음)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양력 1866년 3월 31일). 그의 나이는 39세 때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마르코의 유해는 그의 아들 이냐시오가 돈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모셔왔다. 그러나 명례에는 지방 유징들의 반대로 모시지 못하였고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의 노루목에 안장하였다. 그 후 진영본당에서는 순교자의 묘소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지로 이전하였다.(1975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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