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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소경을 고쳐주시다 (마태오 9,27-31)

- 2015년 12월 4일(대림 제1주간 금요일) 복음

1204두 소경을 고쳐주시다.jpg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 ‘현실 안주’와 ‘현실 변혁’ 사이에서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의 쾌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기원하는 미사 강론)

- 의정부교구 교하본당 상지종 신부

1204 현실 안주와 현실 변혁 사이에서.jpg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무름’과 지금과는 다른 무엇으로 ‘건너감’ 사이에서 갈등하며 삶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인생은 ‘현실 안주’와 ‘현실 변혁’ 사이의 긴장관계에 놓여있습니다. 물론 ‘현실 안주’이든 ‘현실 변혁’이든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아닙니다. 상황, 여건, 목적에 따라서 긍정적 의미를 지닐 수도, 부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에 머물려고도 하고, 반대로 현실을 박차고 나가 극적인 변화나 변혁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면 언제까지나 이 풍요로움에 머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급격한 변화를 추구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공동체에서 권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이를 놓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외면당하고 공동체 안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자신을 고립시키는 현실을 깨뜨리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일어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안주하려는 성향’과 이와는 상반되는 ‘변화나 변혁을 추구하는 성향’ 모두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쫓는 본능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능적인 욕구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이기적인 탐욕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능적인 욕구가 ‘나-너-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어울리는 공존의 세상’을 지향할 때에, 비로소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삶의 극적인 변화를 꿈꿨던 사람들을, 그러나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 그곳에 머물고자 했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기에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단절당한 눈먼 두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시력을 회복함으로써,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극적인 변화의 때를 맞은 이 두 사람은 간절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실 수 있는 분이라 믿었던 예수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으시자, 그들은 “예, 주님!”하고 서슴없이 대답함으로써,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자신들의 삶의 변화의 또 하나의 주체로 당당히 나섭니다.

시력을 찾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을 현실로 맞이한 이들은, 이 현실을 이루어주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이 이들에게는 곧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신 현실에 대해서 주저함 없이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치유 받은 두 사람의 ‘현실 변혁의 간절함’에도 그리고 ‘현실 안주의 애틋함’에는, 볼 수 있는 이와 볼 수 없는 이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이에게 새로운 시력을 주심으로써, 억압과 차별 없는 세상,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이끄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과연 ‘안주해야 할 현실’입니까, 아니면 ‘변혁해야 할 현실’입니까?

함께 살자고 외치던 순박한 농민들이 있습니다. 경제논리를 내세워 이들에게 등 돌린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제발 우리의 절박한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온몸으로 절규하던 한 농민이 있습니다. 물대포를 직사하여 선한 농민을 쓰러뜨리고 죽음의 지경에 몰고 간 살인적인 폭력 경찰이 있습니다.

경찰의 수장이라는 사람은 아랫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참 잘했다고 두둔합니다. 앞으로도 불법폭력 시위를 엄단하겠다고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벌써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할 엄중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말입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싸늘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국민을 대하다가 외국순방길에는 환한 웃음 짓는 우리의 공경하올 대통령은 한 술 더 떠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다가 폭력 진압에 맞서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나라 국민들을 현재 지상 최악의 테러집단인 IS에 비유하면서 상생할 수 없는 적으로 규정합니다.

국민과 국가를 섬기며 돌보라고 대통령으로 뽑아줬더니, 마치 소꿉놀이 하듯 대통령놀이 즐길 테니 함께 놀아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겁박하는 형국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언젠가 빼앗기는 사람도 없고 빼앗는 사람도 없는 상생의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 때는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는 이야기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걸치며 행복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한 걸음 물러나 제 살 길 찾는 비겁함을 벗어던지고, 빼앗기는 벗들의 편에 서서 빼앗는 이들에게 당당히 맞서야만 하는 현실 변혁의 때입니다.

언젠가 작은이들의 목숨 같은 외침이 힘없이 사그라지지 않고, 모든 이의 마음 안에서 되살아 울려 퍼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는 현실에 안주하면서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소리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공존의 화음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작은이들의 간절한 울부짖음을 잔인하게 짓밟는 이들과 이들의 충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짓 언론들의 무자비한 공세에 온 몸과 마음으로 저항하며 가난한 이들의 힘찬 목소리가 되어야 할 현실 변혁의 때입니다.

언젠가 대통령과 정치 권력자들이 한줌 재로 사라질 권력을 향한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환한 웃음과 따스한 손길로 오직 국민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는 현실에 안주하면서 가장 낮은 곳에 자리 잡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과 이들을 존경하는 국민들이 함께 신명나게 춤출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국민의 고통스런 삶에 전혀 공감하지 않으며 권력 놀음에 이성을 잃고 광기어린 질주를 멈추지 않는 정치 지도자들을 정의로 책벌하고 사랑으로 회개하도록 촉구해야만 하는 엄중한 현실 변혁의 때입니다.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님께서 여전히 침묵 중에 누워 계십니다. 하지만 지난 11월 14일 저녁 살인적인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시던 그 모습으로 어두운 현실을 깨뜨리고 새벽을 열라고 우리를 재촉하시는 듯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님께서 예전의 강건하신 모습으로 일어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죽은 듯 쓰러져계신 임마누엘 형제님과 함께 폭압적인 정권의 손아귀에 질식해가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하나 둘 모이고 모인 여리지만 모질고 강한 민초들의 힘으로 다시 찬란하게 부활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다짐이고 우리의 결연한 투쟁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들이여! 두려움 없이 힘차게 나아갑시다.

 

▣ 첨언

하느님 나라의 정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여 분별하게 하고 사람을 소외시키는 마귀를 내쫓게 한다.

소외는 현실을 바꾸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렇지만 해방을 가져다주는 정의는 구원을 독차지하고서 특권자들의 작은 집단에 가두어두려 드는 자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눈이 있으되 사물과 사건의 현상만 보고 본질은 보지 못하는 수가 많다. 사물과 사건 속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면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

그런 눈과 시력이 없어 못내 아쉬워하고 열망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예수께서 믿음의 시력을 되찾아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시력과 빛을 되찾아주고 싶으시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은 단순히 시신경을 되살려 주시는 데 그친 기적이 아니었다. 그 기적은 마음의 눈을 떠서 역사와 현실을 부유한 사람들과 권력자들의 시각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피지배자들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기적이었다.

그래서 그 기적을 함부로 아무에게나 떠벌리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 기적은 가난한 사람들과 피지배자들이 알아들어야 할 기적,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할 기적이었다. 완고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그런 기적을 가장 무서워한다.

 

※ 출처 ⇒ ‘길 위의 신앙 : 하느님의 길- 사람의 길’ 제290호 (정의·평화·민주가톨릭행동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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