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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3 23:59

그리스도인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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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자 요한의 출생(루가 1,57-66)

- 2015년 12월 23일(대림 제4주간 수요일) 복음

1223 세례자 요한의 출생.jpg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현실

- 의정부교구 교하본당 상지종 신부

1223 그리스도인의 현실.jpg

설렘으로 기다려온 성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달콤하지만 빛바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기억됨으로써 현재화되어야 할 신비로운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과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이상을 좇아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현실에 매몰되어 이상을 내팽개치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상을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드립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전혀 차원이 다른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라는 현실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나라와 복음’이라는 현실을 동시에 살아가야 합니다. 앞의 현실이 ‘꿈과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현실’이라면, 뒤의 현실은 ‘꿈과 이상을 품은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두 가지 현실 모두를 소중히 품에 안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이라는 삶의 현실에 집착하여, 하느님나라와 복음을 지금 살아야 할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성 없는 숭고한 이상이나 내세에나 주어질 현실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일상생활 안에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기 십상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하느님나라와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의 거룩한 장식물처럼 다루어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상한 기호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교회를 인간적인 친교의 발판쯤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늘어나지만, 세상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뜻하신 바와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비(非)복음적으로 전개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쯤에서 무엇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현실인지, 무엇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현실이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가정, 직장, 사회, 정치, 경제 등 세상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니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만을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몸소 살아야 할 현실’이 아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고상한 이상’으로 넘겨버리는 그릇된 현실 인식만은 경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전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현실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의 할례식에 아기의 부모와 친척들과 이웃들이 모입니다. 이들은 분명 하나의 시간, 하나의 공간, 하나의 현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아버지 즈가르야와 어머니 엘리사벳이 느끼는 현실과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은 다릅니다.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느냐 아니면 ‘즈카르야’라고 짓느냐라는 문제는 ‘과연 무엇을 절박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다름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인간적인 전통을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모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알려준 대로 아기 이름을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신다,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뜻을 지닌 요한이라고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현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도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번져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우선적으로 보듬어야 할 참된 현실은 하느님나라와 복음이어야 합니다. 이 현실을 또 다른 현실, 즉 구체적인 삶의 현장 안에서 실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성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하루 함께 하는 이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구원의 현실을 기쁘게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 첨언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기와 그 아기의 사명에 관한 하느님의 계 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이 끝났다는 것은 구원을 기다리던 기간이 끝났음을 뜻한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는 뜻이다. 요한은 가난한 사람들과 변두리로 쫓겨다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하느님의 은총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의 심부름꾼, 선구자가 될 것 이다.

 

※ 출처 ⇒ ‘길 위의 신앙 : 하느님의 길- 사람의 길’ 제309호 (정의·평화·민주가톨릭행동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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